결혼식 전날 밤

출처 : 다음 블로그(http://blog.daum.net/jijabella/10725015)

<휴우…>

선희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가슴 한 가운데에 커다란 돌 뭉치가 들어선 것 같은 중압감이 느껴졌다. 아니, 돌보다는 차가운 쇠뭉치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은 표현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누워 있던 침대의 푹신한 매트리스는 점점 더 밑바닥으로 잡아끄는 뻘 구덩이 같았다. 같은 느낌과 감촉, 그 물건 자체라도 이렇게 사람의 기분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현실 앞에 선희는 그저 연달아 한 숨을 내쉴 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건 오로지 누운 자세에서 들어오는 천장의 한 복판이었다. 허하게 비어 보이는 그 모양새에 선희는 낯선 동질감마저도 들었다. 천장에 달려 있어야 할 형광등마저도 저 만치 떨어진 무인도처럼 쓸쓸히 밀려나 있다.
자세히 보면 아무것도 없는 공백만은 아니다. 하얗게 발라진 천장의 벽지에는 희미하게나마 연분홍색 꽃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평소였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그 싸구려 문양이 오늘 따라 선희의 심사를 긁어 댔다.

<씨발.>

욕지거리를 내뱉어 보았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자신의 이 작은 공간에서는 들을 사람마저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 한쪽 귀퉁이를 보았다. 어떤 놈이 이 집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형광등을 저렇게 구석에 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단순한 장난 끼였을지도 모른다. 그 역시도 아니라면, 그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사에서 필연적이면서도 우연적으로 발생한 실수인지도 모르고.

그런 면에서 천덕꾸러기 형광등은 선희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과 연애를 시작한 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도 아니라면 단순한 호기심의 발로에 의한 장난질이었다든지… 그렇게 생각하면 슬퍼진다.
장난이 너무 지나쳤다. 상대방은 어떤지 몰라도 선희 자신의 마음은 갈갈히 찢겨져 있었다. 마지막 경우의 수를 떠올려 본다. 미친 듯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인간은 가끔씩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는 가정. 하지만, 이런 가정은 선희를 더욱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실수와 장난. 사람간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선희에게 있어서는 그 둘 모두 터부시 되는 것들이었다. 아이들이 장난삼아 던진 돌에 치여 죽는 개구리도 불쌍하지만, 실수로 던져진 돌이 개구리를 짓이겨 버렸다는 사실 역시 또 다른 비참함이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결과에 따른 비참함의 가치 비교 판정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인연에 관한 거였다. 죽음이 아니라 서로 간에 이어졌던 관계가 장난과 실수에 의해서 맺어졌다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었다. 차라리 죽음 그 자체에서 가치 비교 우위 판정이 끝났다면 지금처럼 마음이 무겁지도 않았을 것이다.

눈을 감았다. 이 엉성한 철학적 논리의 경연장에서 어서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도 봐주는 사람도 없는 이 경연장에서는 상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선희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지옥 같은 상황이 있을까?
손을 더듬어 침대 맡을 짚었다. 찾으려고 했던 것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제야 선희는 진리 하나를 깨닫는다. 뭔가 필요한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간에 원할 때는 곧 바로 잡히지 않는 다는 것을.

간신히 찾은 물건은 얄팍한 종이 봉투였다. 고작 1그램도 안되는 종이 봉투였건만, 지금의 선희에게는 천근 만근이상의 무게로 다가왔다. 한 팔만으로도 들 수 있는 이 1그램짜리는 마음으로는 절대 들 수 없을 것 같은 중량감을 전해 왔다. 손으로 전해진 이 감각은 머리가 아니라 지금 현재 쇳덩이가 들어선 가슴께로 향했다.
이미 커다란 덩어리가 들어서서 좁아터질 것 같은 가슴은 단 1그램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는 주책없이 그걸 들어 올리라고 명령한다. 충실한 하인인 손은 머리의 말만 듣는다. 특히나 반년 전에 가슴이 명령했던 해고 통지를 받고 반발한 다음부터는 더욱 더 머리의 말만 들었다.

눈앞에 강제로 들이대진 봉투에는 천장의 그 무늬처럼 연분홍색의 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다만 양각으로 화려하고 정교하게 돋아진 탓에 밋밋한 천장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존재감을 빛냈다.
열어 볼까 했지만 가슴이 계속 거부한다. 그러나, 손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봉투를 열어 재꼈다. 눈앞에 보인 것은 봉투와 마찬가지로 화려하게 꾸며진 카드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과 같은 것을 받았을까?>

스스로 자조적인 말을 내뱉으며 선히는 입 꼬리를 올렸다. 카드에는 자신의 무력함을 담은 경멸의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이미 몇 번이고 확인했던 내용이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 할 수 없는 현실이 그 안에 담겨 있었고, 그것을 확인하는 절차는 선희에게 있어서 몸서리칠 정도로 가혹했다.

<재석이 선배 결혼한다고 하더라.>

<<개새끼!>>

마음속으로 외쳤던 그 욕지거리는 선배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눈치 없이 자신을 불러 제키고는 카드 한 장 덜렁 들려 보내면서, 생각 없이 저 소리를 한 동기 녀석에게였다. 유별나게 친한 사이도 아니면서, 소식 전달용 비둘기 노릇을 톡톡히 하는 그 친구가 선희는 못 마땅했다. 녀석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의 경조사를 사방에 알리는 것 외에는 없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건네고 그 바보와 헤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선희에게 있어서 카드를 받은 그 순간부터 들어 선 생각이라는 건, 1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조건 반사적인 반응뿐이었다.

<… 선배.>

금박으로 양각된 이재석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손으로 만져 보면서 선희는 희미한 속삭임을 시도해 본다. 하지만, 그 말이 그에게 전해질 리는 없었다. 작은 속삭임이라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촌스러운 벽지가 발라진 이 곳과 지금쯤 분주하게 준비 중일 그의 집과의 거리 역시 문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던, 지금은 끊어져 버린 실과 관계를 단절시킨 보이지 않는 벽이 문제였다.

카드를 내려놓은 손이 천천히 스며들어오는 물처럼 옷 속으로 들어왔다. 마치 선희 자신의 팔이 아닌 타인의 것인 양 차가운 그 손은 천천히 몸을 탐식해 갔다. 가슴에 실팍한 살들을 몇 번 뭉쳐 쥐는가 싶더니 어느새 허리께를 어우르고 있다.
손은 선희의 기억 속에 있는 재석의 움직임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 완벽하게 닮아 있는 동선들의 집합은 셀 수 없을 만치 많은 관계를 통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완벽한 흉내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소름끼치도록 닮아 있는 이 손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그 차이를 깨닫는 순간 선희는 이미 감고 있던 눈에 한껏 힘을 더 넣어 닫으려 했다. 입에서 애처로운 소리를 낸다.

<선배…>

<선배… 그만해요.>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선희는 거부 의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말에 담긴 의미가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는 않았다. 한층 더 격정적으로 옷 속에서 손이 움직였고, 그 바람에 짧지만 분명하게 신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손의 주인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머금으면서도, 분주하게 그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정 싫으면 반항해 보던지.>

맞는 말이었다. 얼마든지 그를 떨쳐 버리고 일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거부의 말과는 달리 마음은 농락하는 손에 모든 걸 그대로 내맡겼다.

얼마나 바라고 꿈꾸어 오던 일이었던가?

대학교에 들어와 선후배간의 상견례 자리에서 처음 재석을 본 순간부터, 선희의 가슴 한 가운데에는 재석의 모습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몽상과 그리움 속에서 그의 육체를 얼마나 탐하고 원했던지 모른다. 그런 망상과도 같은 일이 현실화 되었을 때, 기쁨 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지금 맞이하는 이 순간이 자신이 꾸고 있는 또 다른 상상의 꿈이 아닐까하는. 그래서, 어느 사이엔가 눈을 뜨고 나면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까 하는 염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감각은 너무도 확실했다. 꿈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이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을 타고 밀려 왔다.

선희가 걱정과 혼란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각은 착실하게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고 실재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한껏 가슴을 매만지던 재석의 손을 붙잡았다.

재석이 얼굴을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 동안 머릿속으로만 생각해 오던 욕망이 한 층 더 끓어올랐다. 비좁은 감방을 벗어난 탈주범처럼 욕망은 미친 듯이 내달렸다. 붙잡았던 재석의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가져갔다. 크고 투박한 남자의 손바닥에는 선희 자신의 체온과 합쳐진 열기가 느껴졌다. 그도 자신만큼이나 달아올라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의문을 가지고 질질 끌 새가 없었다.

입가에 가져갔던 손을 핥았을 때, 재석은 그대로 먹이를 던져 주듯 내버려 두었다. 혀를 통해 전해져 오는 손 등 위의 잔털들은 잔뜩 긴장한 채 곧추 서 있었다. 느껴지는 그의 응답에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먹이감은 손이 아닌 입술이었다.

<너 정말 게이였구나?>

순간 섬뜩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재석의 입술은 차갑게 식은 시체처럼 온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나 원했던 그것이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닿을 수 없어 보였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선희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비하와 조롱, 경멸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있던 일들이 모두 거짓처럼 느껴졌다. 재석의 애무도 그의 온기도 또 다시 언제 나처럼 머릿속에서만 굴리던 공상 같았다. 너무도 현실 같아서 진짜처럼 믿어 버렸던 꿈처럼.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애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있더라고.>

재석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선희도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경로 한 두개쯤은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런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섣부르게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럴 때는 차라리 묵비권을 행사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 믿었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그런 세인들의 저속한 관심은 언젠가 자신에게서 떠날 것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속에 자신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 재석이 있다는 사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그제야 재석이 자신을 집으로 부른 이유를 깨달았다. 그 얄팍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잔꾀에 불과했던 것이다. 잡고 있던 손은 어느 새 놓은 상태였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려던 선희의 손을 재석의 손이 붙잡았다. 거부하려 했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게 힘을 주었다.

<놔요!>

뿌리치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죄어오는 올무처럼 재석의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놔! 놓으라고! 이 새끼야! 놓으란 말이야!>

악을 써대며 반항을 해보았지만 상대방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우악!>

재석의 입이 짧은 고통을 토하고 나서야 겨우 풀려 날 수 있었다. 배를 부여잡고 있는 재석은 잔뜩 웅크린 채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선희는 걱정이 되었지만, 쉽사리 다가서지 못했다. 그로서는 죗값을 받음 셈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재석에 대한 걱정이 들어 서 있었다.
한 동안 갈등을 했지만, 선희는 그대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기다려!>

신발을 거의 다 신은 선희의 등 뒤에서 재석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는 여전히 아픈 배를 부여잡은 채였다. 그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단순한 유희 거리로 자신을 대한 재석의 행동은 매우 괘씸하게 느껴졌다.

<이제 궁금한 거 다 해결 하셨잖아요.>
<미안하다.>

재석의 손이 어깨에 얹혀졌다. 선희의 몸이 또 다시 열에 의해서 서서히 덥혀져 갔다. 못내 아쉬웠지만, 얹혀진 손을 털어 버렸다.

<내일이라도 당장 학교에 소문을 내지 그래요? 다들 짐작했던 대로 내가 호모새끼였다고.>
<놀릴 의도는 아니었어.>
<아니라고요? 그럼 뭐예요?>
<그냥… 장난으로…>

어설픈 변명거리라고 내민 자신의 바보 같은 말에 재석은 순간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쏟아진 물과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속담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선배는 장난으로 이런 행동을 했다는 거군요. 놀릴 의도는 아닌데, 장난이었다라… 참 대단한 이유네요. 남자든 여자든 장난삼아서 옷 벗기고 같이 자고 그러나 보지요?>

울분에 겨워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들어 한 선희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급히 감추기 위해서 돌아섰지만, 재석 역시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연이은 실수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잠깐만! 잠깐만,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응?>
<그만 하세요! 얼마나 더 저를 괴롭히려고 그러세요?>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일단 진정하고…>

거세게 반항을 했지만, 선희에게 있어서 재석의 그 말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그는 전혀 깨닫지 못한 듯 했지만, 선희는 재석과 지금 벌이고 있는 실랑이조차도 슬프지만, 황홀한 상황 설정이었다.

결국 못 이긴 채 다시 들어왔지만, 여전히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기운은 가실 줄을 몰랐다. 선희는 아까의 거센 반응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서로간의 눈치를 살피던 끝에 재석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조금이라도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소일거리를 찾았다. 찬장에서 종이컵과 인스턴트커피 믹스를 꺼냈다. 물만 끓이면 될 변변치 않은 대접이었지만, 재석으로서는 이 거북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왜 그랬어요?>

선희의 첫 번째 물음에 재석은 듣지 못한 것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차 물어 오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 방금 뭐라고 그랬어?>
<왜 그랬냐고요? 궁금했다면 차라리 물어 보지 그러셨어요.>
<물어 보면 정직하게 대답해 줬을까?>

맞는 말이었다. 재석뿐만이 아니라 그 누가 물었어도 선희는 똑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아니.>>라고.

<그리고, 그런 걸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까는 그랬잖아요?>
<아까?>

재석은 물을 부으며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아아! 그거? 그… <<너 정말 게이였구나?>>라고 말한 거 말이지? 야, 그건 직접 물은 게 아니라 확인한 거지.>
<확인했으니 이제 됐지요?>
<기다려! 갈 때 가더라도 커피는 마시고 가.>

황급히 일어서려던 선희를 재석이 막아섰다. 종이컵을 건네주고는 그대로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별 수 없었다. 재석의 요구를 들어 주는 수밖에.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그와 동시에 재석과 지금처럼 가까이 있고 싶은 욕망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학교에 말 할 거예요?>
<애들한테? 아니.>
<상관없어요. 어차피 숨긴다고 해도 언젠가는 밝혀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오히려 매도 일찍 맞는 놈이 낫다고, 차라리 선배가 소문내는 게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미안하다.>

재석의 한 마디에 선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내가 너무 경솔했어. 설마, 정말… 네가 동성애자였을 줄은 몰랐어. 그저 가볍게 장난처럼.. 아니, 미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악의가 있어서 너한테 그랬던 건 아니야.>
<알았어요.>

심드렁하게 대답을 했지만, 선희에게 있어서 재석의 방금 그 말은 큰 상처였다. 차라리 단순한 장난이었다고 치부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재석이 자신에게 아무런 연애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구태여 재확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쓸데없는 미련으로 맛대가리 하나 없는 인스턴트커피나 얻어 마시고 있는 자신의 행동을 원망했다.

<<좀 전에 그냥 집에 가는 건데…>>

후회를 했지만 이미 기회는 지나간 뒤였다.

<저기… 나는 그러니까 동성애자들에 대해서 잘 몰라.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해 할 수 없어도 노력은 해 볼게. 그리고, 잘 되었으면 좋겠다.>
<무슨 말인지…>
<언젠가.. 음… 그러니까… 너하고 비슷하거나… 같은 사람을 만나서 행복했으면 해. 지금 이 말은 절대 장난으로 건네는 게 아니야.>

마른 침이 선희의 목구멍을 쓰리게 훑고 넘어갔다. 선희에게 있어서 재석의 지금 이 배려
는 오히려 독이 되는 말이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선희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바람에 놀란 재석은 방바닥에 커피를 쏟고 말았다. 미처 닦을 겨를도 없이 그는 문으로 향한 선희를 불러 세웠다. 그러나, 선희는 더 이상 멈추려고도 돌아서려고도 하지 않았다.

<야, 임마! 거기서!>

어깨를 잡히고 강제로 몸이 돌려졌지만, 얼굴만큼은 재석을 외면하고 있었다.

<또,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거냐?>

그 순간만큼 재석이 잔인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순진무구한 잔혹함으로 점철된 동심의 손이 나비의 날개를 찢는 것처럼, 재석의 말은 너무도 순진하다는 것이 죄악이었다.

<있지요. 선배… 재석이 형… 나 정말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데…>
<그래. 그래서,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거잖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힘내라. 그러면…>
<형은 안 되겠지요? 재석 선배를 마음에 담으면 안 되는 거지요?>
<뭐?>

순간적으로 재석의 머릿속은 신호가 끊어졌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얼빠진 표정으로 선희를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이 맹랑한 후배의 반응들이 이해가 갔다. 자신은 그런 후배의 간절한 심정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 것이다. 모르고 했다고 해도 잘못의 책임이 전가되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고 해결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무래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후배의 발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로서는 전혀 생각해 본적이 없는 고백 상대였다. 여러 가지 면에서…

<왜 나를 좋아하는 건데?>
<사람을 사랑하고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요?>

울먹이는 선희의 말에 재석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불행하게도 이 순간에서는 불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은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오고 있었다. 매몰차게 거절하기에는 그의 마음이 너무 여린 것도 이유였다. 게다가, 자신이 저지른 경솔한 실수에 대한 죄책감도 한 몫 단단히 하고 있었다.

결정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고.

침대 시트는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선희의 몸 역시 스스로 흘린 땀으로 뒤덮여 있는 상태였다. 손 안에서 꿈틀거리던 열락의 흔적은 그 특유의 끈적임만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배에도 이미 한 번의 침범이 있었음을 알려주듯이 서릿발처럼 하얗게 앉아 있었다. 가슴에 손을 대 보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천천히 뛰고 있는 심장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금 보다 한층 더 격렬하게 움직였었다.

후회와 좌절감이 밀려왔다. 철없던 사춘기 시절에 마스터베이션을 했어도 지금처럼 비참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이미 닳을 대로 닳아빠진 시간을 밟아 온 지금에 와서 새삼스레 들러붙으려는 불편한 도덕성에 선희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마치 그것을 털어 내려는 것처럼. 그러나, 이 비참한 감정의 찌꺼기들은 쉽게 떨어져 나갈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배와 손에 달라붙은 끈적끈적한 그것보다도 더 끈질기게 달라붙으려 했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욕실 문을 열 때까지도 졸렬한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샤워기 레버를 돌렸을 때도 놈들은 끝까지 선희에게 매달리고자 했다. 마치 엄마의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필사적인 젖먹이처럼.

비처럼 쏟아지는 물줄기는 그대로 바닥 아래에서 하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마지막 흔적을 지웠을 때야 비로소 소용돌이는 본래의 투명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에 선희의 머릿속은 6년이라는 시간이 관통하고 있었다.

레버를 잠그자 샤워기는 더 이상 물줄기를 뿜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선희의 머릿속을 지나던 시간들 역시 그 흐름을 멈추었다. 처음 재석과 관계를 가졌던 날은 고백을 했던 바로 그 날이었다.

처음 가졌던 관계에서 두 사람은 제대로 몸을 합치지 못했다. 어색한 웃음을 서로 주고받으며, 주섬주섬 옷을 차려 입던 기억이 떠오르자 선희의 입가가 살며시 올라갔다. 서툴렀지만, 서로가 서로를 가장 원했던 시기였었다.

문득, 앨범을 찾아보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재석에게 고백한 날 찍었던 사진을 보고 싶어서였다. 처음 관계를 가진 후에 기념으로 스냅 사진을 찍었었다. 재석은 별로 원치 않았지만, 선희는 굳이 억지를 부려서라도 찍고 싶어 했다. 두 사람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결국은 선희의 의도대로 사진을 찍기로 했다.

이불을 반쯤 덮고 있는 두 남자의 알몸 사진은 그다지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얼굴에 남아 있는 감정의 흔적은 외견이 아닌 내면의 미를 연상시키곤 했다. 사진 안의 두 사람은 어느 누가 보더라도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재석은 가끔 그 사진을 꺼내 보며 그 날의 추억을 떠올리곤 했었다. 그리고, 늘 선희를 놀려댔다. 그 자신이 그렇게 찍기 싫어했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말리며, 선희는 발을 이끌었다. 기억이 맞는다면 앨범은 구석 책상 서랍에 들어 있어야 했다. 재석과 헤어진 뒤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다시 열어 본적이 없었다. 과연 그곳에 앨범이 제대로 있는지 조차도 의심스러웠다. 기억 어딘가에서 마지막으로 두었던 장소가 지워졌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선희는 어린 시절 보물찾기를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묘한 흥분을 느꼈다. 그의 보물이 서랍 속에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기 직전까지 이 흥분은 떠날 줄을 몰랐다. 드디어 서랍을 열었고, 기대에 찬 질문에 대한 답이 나왔다.

앨범은 아직 서랍 안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느 틈으로 흘러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동안 돌보지 않은 탓에 앨범 커버는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아직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손이 그 위에 선명하게 자국을 남겼다.

앨범을 열자마자 선희를 맞이한 건, 착실하게 붙어 있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폴라로이드 한 장이었다.
찾고자 한 사진은 아니었다.
집어 든 사진 안에는 선희 혼자만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표정은 화가 난 탓에 잔뜩 찡그린 모습이었다. 앞으로 향한 얼굴의 공격 대상은 필시 사진을 찍어 준 사람이었을 것이다.

선희의 두 손이 사진을 비틀었다. 찢으려 했지만, 두껍고 억센 사진은 선희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할 수 없이 온 힘을 다해 꾸겨댔다. 사진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게 뭉개졌다.

<진심이야?>

놀란 선희의 물음에 재석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와서 왜?>

탓하는 목소리는 마지막에 가서 맥이 탁 풀려 있었다.

<너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한 거잖아?>

재석의 목소리는 오히려 선희를 비난하듯이 맞받아쳤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는 듯이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선희는 그런 그의 얼굴에 전혀 동조할 수 없었다. 북처럼 울려대는 심장은 빠르게 혈액을 얼굴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로 인해 화끈거리는 얼굴은 당장에라도 실핏줄들이 터져 나갈 것 같은 팽창 감을 느끼게 했다.

<집에서 의심을 하는 것 같아.>

재석의 그 한 마디에 선희의 분기탱천하던 혈관들은 그대로 수그러들고 말았다. 자신 역시도 그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는, 재석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부류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웠던 건 세상의 눈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었다. 그들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이 알려지는 건 죽음 그 자체와 맞먹을 정도의 두려움이었다.

<<너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한 거잖아?>>라는 재석의 말은 현실적이었고, 피할 수 없이 예정된 종착점이었음을 선희 역시 이전부터 알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그 현실을 현재라는 이 순간 시점에서 마딱트릴 거라는 건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저, 언젠가 다가 올 그 날은 아직은 멀고도 먼 이야기라고 스스로 자위하며 애써 외면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지금 바로 눈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숙제를 미룬 아이에게 체벌을 내리기 위해 다가오는 교사처럼, 현실은 그렇게 준엄한 표정을 지은 채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아직 완전히 알아 차린 건 아니지만… 가족들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아… 너도…>
<우리 도망가.>
<뭐?>

선희의 돌출 발언에 재석의 눈이 놀랄 만치 커졌다. 되묻는 짧은 단 한 마디 조차도 온전하게 발음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선희의 표정은 긴장감으로 잔뜩 굳어져 있었다.

<가족들이 모르는 곳으로 가자고. 거기서 같이 살면 되잖아.>

이 당돌한 발언에 재석은 그저 헛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가슴께에서 담배를 더듬으면서도 그는 간간히 터져 나오는 숨소리를 내며 웃는 시늉을 했다. 이윽고, 손안에 담배가 들려졌을 때야, 비로소 재석은 그 바보 같은 제스처를 멈출 수 있었다.
지포 라이터의 가솔린 냄새가 도움이 되었다. 눈앞에 서 있는 철부지 어린아이의 투정에 잠시 혼이 나갔지만, 불이 붙은 라이터는 효과 좋은 각성제처럼 재석을 현실로 끌어 올려주었다.

한 모금 빨자, 각성제는 효과를 더 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알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잔인한 소리인지. 그러나, 재석은 경험으로 터득한 이 기술을 믿고 있었다. 귀찮게 달라붙었던 그 수많은 여자들을 재석은 이 한 마디로 모두 정을 떼어 버렸다. 최대한 턱을 치켜들고, 거만하게 눈을 내리 깔며 내뱉는 이 말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뭉개 버리는데 더 없이 좋은 수단이었다.

그는 진작부터 이렇게 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선희와 만나기 바로 전부터 그는 이 말을 내뱉고, 정을 끊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하지만,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이 고집 센 후배 녀석을 보는 순간, 그런 계획은 머릿속 저 편에서 사그라들고 말았다. 다행히 담배와 라이터의 도움을 받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 말을 언제 내뱉을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재석은 오늘 그 말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기약 없는 내일로 일을 미루면서.

<어린애처럼 굴지 마. 너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재석이 조금 더 톤을 높였지만, 선희는 반응을 하지 않았다. 표정은 조금 전에 말한 그대로였지만, 용감하게 도망 계획을 외치던 그 입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재석은 그 입에서 눈을 돌렸다. 그대로 있다가는 그 입술을 탐하고 있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애써 외면하는 그의 눈길은 바닥을 향했다. 밀려 올라오는 담배 연기가 따갑게 눈을 찔렀지만, 재석은 머리를 들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못해!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싫어!>
<바보 자식!>

그때까지 숙이고 있던 재석의 머리가 먹이를 노리는 사나운 맹수처럼 들어 올려졌다. 동시에 억센 팔이 사냥감을 잡아채듯이 자신보다 가는 어깨를 붙잡았다. 이렇게도 작고 약한 녀석인데도 고집만큼은 자신보다 강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전혀 없어 보였다. 재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후배의 강짜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바로 눈앞에 방금 전까지 외면했던 입술이 들어오자, 재석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뭔가 말을 꺼내야 했다. 되도록이면 무정하고 냉정한 말을.

<사랑하잖아요… 우리는 서로 사랑했던 거 아니에요?>

고집 센 후배의 목소리는 놀랄 만치 꺾여져 있었다. 바로 전 까지만 해도 세상의 모든 편견을 오히려 조롱하며 꿋꿋하게 서 있을 것만 같던 녀석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재석에게 있어서 또 다른 갈등을 야기 시키는 공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작고 여린 짐승에게 어떤 말로 타일러야 하나…

<그 놈의 사랑… 이제 지겨워. 너는 왜 나를 사랑하는 거냐?>
<사람을 사랑하고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요?>

악에 바치듯 쏟아 내는 그 목소리는 계속 약해져 갔다. 당장에라도 넘칠 듯한 눈을 바라보지 않아도 재석은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외면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기껏 힘들게 얻은 용기와 결심이 무의미해 진다.

<그래,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이유는 없지. 그러니까, 헤어지는데도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어. 그냥… 가족들이 눈치 채고 귀찮게 하는 게 싫은 거야. 이제 만족하냐? 알아들었으면 우리 이제 그만 찢어지자.>
<거짓말.>

앙칼진 한 마디가 재석의 가슴을 후벼 팠다. 날카로운 목소리의 톤이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진실의 힘 때문이었다.

<형은… 선배는 거짓말쟁이에요…>

울먹이면서 눈가를 훔치는 선희의 팔을 보자 재석은 걷잡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선희의 입과 목을 자신의 입술로 더듬고 있었다. 아무 저항 없는 상대를 향해 그는 고기를 파먹는 야수처럼 정신없이 그 몸을 탐했다.

<거짓말쟁이…>

귓가에 들려오는 저항 아닌 저항의 목소리에도 재석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 사냥감의 마지막 단발 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이성은 이미 저 밑바닥으로 던져진지 오래였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이유는 없었다.

<…거짓말쟁이… 사랑한다면서… 좋아한다면서…>
<그래, 사실은 미친 듯이 좋아하고 사랑해…>
<틀려요.>

갑자기 냉랭해진 그 목소리를 재석은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욕망이 절정에 올라 달아 오른 그의 몸은 소리에 대해 둔감해져 있었다. 제차 계속되었음에도 재석은 걸신들린 들개처럼 선희의 몸에 자신의 몸을 부벼댔다.
그가 깨닫게 된 건 죽은 시체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린 선희의 경직된 몸 때문이었다.

<틀려요.>
<뭐가?>
<사람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건…>
<그래,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리고, 사랑한다고…>
<틀려요.>

사사 건건 딴죽을 걸고 귀찮게 구는 일곱 살 배기처럼, 선희는 그 작은 입을 모아 <<틀려요.>>를 연발했다. 이 잠깐의 휴지기 동안에 재석의 남성 본능은 그대로 사그라졌다. 남은 건 불씨 하나 남지 못하고 꺼져버린 시커먼 재뿐이었다. 그것은 재석뿐만이 아니라, 선희도 마찬가지였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건 틀린 거예요. 그리고,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과도 다르고.>

여전히 재석의 머리 속에는 이 선문 답같은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 말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슴 한 켠에서부터 시작된 부재에 대한 상실감이 그 순간 급속도로 커져 같다.
머리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의 심장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 피를 내뿜어 댔다. 이별의 대한 현실적인 감각이었다. 처음 그가 마음먹었던 그 계획이 반대로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 온 것이다.

구겨진 사진을 다시 펴 보았다. 플라스틱 막이 허옇게 일어나, 선희의 몸 한가운데를 가로 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가슴 부근께를 정확히 도려내려는 차가운 메스처럼 보였다. 재석을 떠나보내던 그때 선희의 심장은 그대로 도려 졌다.
사진 속에 혼자 있는 그 잔뜩 부어 오른 얼굴을 재석은 원했다. 헤어지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찍은 선희의 이 사진을 달라고 부탁했다. 아니, 애원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무릎을 꿇고 간절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 모습에 너무도 화가 났던 선희는 더 매몰차게 거절해 버렸던 기억이 있다.

<바보 같은 사람.>

사진 속에 없는 한 사람을 떠 올리며 선희는 혀를 찼다.

<그런 얼굴을 할 거면서 왜 헤어지자고…>

재석이 그토록 원했던 이 사진은 이제 선희의 손에 의해 구겨졌다. 가슴 한 편은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아리게 남겨둔 것처럼 흠집까지 낸 상태로 말이다. 돌이켜 보면 재석이 그토록 사진을 원했던 그 시절에, 선희는 어쩌면 가당치 않은 우월감 때문에 자신에게 전혀 필요도 없는 이 사진을 주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유치한 고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무너졌을 것이다. 정말 사진에 얽매여서 필사적이었던 건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재석이 아니라 선희였다.
못난이 사진은 끝까지 남아서 사람 속을 태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찢으려고까지 했던 이 사진이 이제는 미련의 마력을 내뿜고 있었다. 승리의 대한 훈장쯤으로 가지고 있던 기념품은, 약해진 노병들에게 그렇듯이 어느덧 선희에게는 마지막으로 남은 위안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신기하게도 오늘 앨범을 펼쳤을 때 우연히 마주친 녀석인데도.
베란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지포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요 몇 년 간 늘었던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라이터의 불심지는 담배가 아닌, 사진을 향하고 있었다. 하얀 연기가 잠시 피어오르는가 싶더니만, 사진은 이내 쭈그러든 노인네처럼 힘없이 스러져 갔다. 일부는 연기로, 일부는 재로, 일부는 그도 아닌 분류하기 힘든 부스러기로.

그 순간, 선희는 찾고 있던 물건의 위치를 기억해 냈다. 초조하게 답안을 떠올리려고 전전긍긍했던 수험생의 입장을 이제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되었다. 의외로 바로 곁에 있었음에도 떠올리지 못한 자신의 머리를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
앨범 외에도 컴퓨터로 저장해 둔 사진들이 꽤 있던 걸 떠올렸다.

새벽녘에 킨 컴퓨터는 그 특유의 팬 소리를 내뿜으며, 시꺼먼 화면을 곧 바로 화사하게 바꾸어 갔다. 선희의 기억이 맞다면, 오래 전에 만들어 둔 파일 폴더에 사진이 있을 터였다. 첫날 밤 거사를 치루었을때 찍었던 그 사진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폴더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렇게 눈에 띄지도 않았건만, 오늘 같은 날에는 땅바닥에 떨어진 만원 짜리마냥 너무도 확연하게 보였다. <<재석과 선희의 추억>>이라는 유치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쓴 웃음을 지었지만, 그 시절에는 아마 그런 걸 미처 깨닫지도 못할 정도로 행복에 겨운 시절이었을 것이다.

클릭하자마자 열린 폴더 안에는 수백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서 유일하게 과거를 돌아 볼 수 있는 그 흔적들이, 그렇게도 많이 쌓여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알게 모르게 차곡차곡 쟁여 놓았던 추억이라는 이름의 그 유치한 기록들이 어느덧 그렇게도 많이 담겨져 있었나 보다.

이제는 거울의 비친 모습과 확연히 구분되는 앳된 얼굴이 화면 가득히 여기저기서 웃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한 명의 건장한 남자 역시 꽤 젊어 보였고, 자신감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 폴라로이드 사진을 두고 옥신각신 하던 시기에 두 사람은 이미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모습들이 아니었던 것 같다.

쓴 웃음을 다시 한 번 지으며 선희는 마우스의 가운데 휠을 돌렸다. 천천히 내려가는 스크롤바를 통해 보이는 자신과 꼭 닮은 얼굴들은 다양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언제나 즐겁지만은 않았던 듯, 잔뜩 뾰루퉁한 모습도 보였다. 그런가 하면 너무도 순진하게 이쪽을 보고 함박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얼굴도 있었다. 그리고, 욕망을 가득 머금은 채 애인을 바라보는 요부의 눈을 지닌 사람도 다름 아닌 선희 바로 그 자신이었다.

휠을 한 번 굴릴 때마다 다양한 표정으로 과거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휠이 멈춘 곳에는 가장 행복한 얼굴이 그 자신에게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알몸으로 상채를 드러낸 가녀린 어깨의 주인공은 카메라를 한껏 여유 있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아직은 부끄러움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볼가는 옅은 분홍색이 서려 있었다. 그에 반해서 옆에 있던 남자는 몹시도 난처한 표정이었다.

<푸흡.>

첫 날의 결합이 실패로 돌아가자 재석이 몹시 상심했던 게 기억났다.

<괜찮아요.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 될 때가 올 거예요.>

당황하던 재석에게 건넸던 말이었다. 평소의 당당하던 모습과 다르게 당황하던 재석에게 선희는 그 나름대로의 최선의 배려로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재석은 오히려 더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었었다.
이번에 결혼 할 신부와의 첫날밤도 그렇게 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녀 역시 어쩌면 선희와 똑같은 말을 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 숫기 없는 총각 아닌 총각에게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석을 더욱 더 수세에 몰고 싶다면, 그러한 직접적인 어필은 전혀 필요치 않았다. 단지, 한 숨만 쉬고 멍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다.

<아마도… 이제 그렇게 바라보는 건 내가 아니겠지.>

보기 좋게 휘어진 눈초리가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아마 어제였다면 생각도 못했을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저 할까 싶었지만 의외로 손은 덤덤하게 움직였다.
화면에 잠시 동안 보였던 게이지는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것만으로는 끝이 아니었다. 그 많던 시간의 흔적들은 단 1분도 채 안되어서 저만치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마지
막으로 완료 버튼을 눌렀을 때는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돼버렸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중얼거림을 한 번 했을 뿐이고, 그대로 컴퓨터를 껐다. 변한 건 없었다. 적어도, 그의 외견과 지금 현재 환경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조차도 조금 전에 끝마친 일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어제까지 느꼈던 미움과 질투, 증오, 갈등은 거짓말처럼 지금 사라진 채 였다. 특별히 뭔가의 계기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예전처럼 혼자서 추억에 사로 잡혀 훌쩍거리는 걸 반복한 일상의 한 패턴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패턴의 마지막 과정은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닳아빠진 톱니바퀴처럼 된 진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가? 그럼에도 톱니는 계속 돌 것이다. 비록 닳아 버린 이를 가질지 언정, 언제나 거침없이 돌면서 시간을 맞이하리라.
단지, 이제는 더 이상 거기에 얽혀 덜거덕거리는 메커니즘에서 벗어난 것뿐이다.

그 뿐이다.

2007년 2월 12일 월요일… 항상 어려운 시기에 힘을 준 친구에게 감사하며, 늦었지만 작고 볼품없는 생일 선물을 단지 정성이라는 변명을 붙여서 남긴다.

jijabella

About 이 광희

이 블로그의 운영자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You may use these HTML tags and attributes: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 <strike>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