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나는 죽어 가고 있다. 하지만, 행복하다. 마지막으로 가는 이 길에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기에.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 할 따름이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대략 70여 년 전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것은 그녀와 같은 인간으로서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있어서 그렇게 기나긴 시간동안 그녀를 바라보아 왔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어느 사이엔가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 버렸다. 정확하게 지금 하고 있는 말로는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나는 확실히 그녀의 마음을 느낌 같은 것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인해서인지 나는 이내 곧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기습적이고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감정을 애써 부인하려 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그녀와 내가 살아온 시간의 간격 이외에도 여러 가지로 현실적인 문제가 직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 자신에게 이러한 문제는 전혀 상관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무척이나 예의 바른 아가씨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양과도 같은 정열과 밝은 얼굴을 결코 숨기는 법이 없었으니.
내가 그녀에 대한 감정을 부인하는 건 어쩌면 내 자신의 비겁함과 열등감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렇다. 아마도 나의 이 비겁함이, 열등감이…
아니, 솔직히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비겁한 녀석이라고. 그리고, 아울러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패배자라고 말이다.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다.
내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이 무너지고 깨지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다. 그런 것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다. 다만, 이렇게 형편없는 내 자신에 비해서 그녀는 너무도 완벽하고도 사랑스럽기에 그것이 너무나도 가슴 아플 뿐이다.

그녀는 이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가 처음 만났었던 초창기 시절에는 스스럼없이 자주 내게 안기곤 했었다.
그녀와 나의 포옹은 순전히 그녀의 부모님 덕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나를 무척이나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부부들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나에게 그녀를 맡겨 놓았다.
아직 갓난아기 시절에 내 무릎에 앉혀진 그녀는 처음에는 익숙지 않은 나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었던 모양이다. 그 맑고 커다란 호기심을 가득 담은 눈동자가 한동안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으아아앙!”

요란한 군악대와도 같은 그녀의 울음소리에 나는 기겁을 하고는 달래려 했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참을 울고 있었을 때야 비로소 겨우 그녀의 어머니가 달려왔다. 그때까지도 이 한심한 놈은 어찌 할 바를 모른 채, 단지 울고 있는 어린 아기를 달랜다는 목적으로 그녀의 몸을 안고 그네를 태우듯이 흔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겨우 어머니의 손에 안기자 그녀는 안심한 듯이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나는 평생 동안 그녀의 그 시절에 지어 보였던 그 해 맑았던 웃음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마도… 내가 운명처럼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찰리… 찰리…”

아직 채 혀를 떼지도 못했지만, 그녀의 힘차고 생기 넘치는 목소리는 분명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늘 나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
어머니의 팔에 안겨 바둥거리며 옹알거리던 그녀의 말대로 나는 그 후 부터 그녀의 찰리가 되었다.

“난 커서 찰리에게 시집갈 테야.”

오, 이런!

“농담이라도 제발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아가씨. 이 미천하고도 어리석은 놈은 당신의 그러한 문득문득 던지는 장난스러운 한 마디 말에도 놀라고 상처받는 답니다.”
“알았지? 꼭 약속해.”

나의 애타는 마음을 알고는 있는 건지 그녀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 가슴은 알 수 없는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내 눈은 이미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도 없게 되어버리곤 했다. 심지어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그녀가 내 무릎 위에 앉아 내 가슴에 안겨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어서 어서 빨리 커야지.”

마치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듯이 꿈꾸는 듯 한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너무도 사랑스러울 정도로.

아가씨. 하지만, 알고 계십니까? 당신과 저 사이에 가로 막혀 있는 이 수 많은 현실들을? 지금은 당장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들은 저주스러울 정도로 확연히 그 모습을 들어 낼 것입니다. 그럴 때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적이 수천만, 아니 수만 번도 더 되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말 할 수 없었다.

“어서…”

라고 시작하며 말하는 그 작고 귀여운 입술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사이엔가 내 입술은 그녀에게 갑작스럽게 키스를 당한 것처럼 굳게 닫히고 말았던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철없을 아이와도 같은 바람을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사실은 나 역시도 그녀와 같은 바람을 꿈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그녀와 나 사이에 그러한 바람은 단지 바람으로 끝이 날뿐, 결코 현실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근거 없는 짐작이 아닌 사실로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로 확연히 들어났다.

그녀에게는 성장이라는 과제가 버거울 정도로 긴 시간이었지만, 그런 그녀를 지켜볼 뿐인 나에게는 단지 한 순간과도 같은 그런 것이었다. 그것이 현실로서, 그리고 부인 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로 다가오기 전에 그녀와 내가 간직했던 그 추억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도 또한 값진 것이었다.

“이쪽이 찰리야.”
“우와! 멋진걸!”
“감사합니다. 도련님.”

어느 날엔가 그녀가 데리고 온 이웃집 소년은 그녀가 처음 나를 보았던 때와 마찬가지로 경이로운 무언가를 보는 듯 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칭찬에 짧게 감사의 말을 표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를 생각한다면 그녀의 손님인 소년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해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평소 같았다면 그보다는 한 마디라도 더 했겠지만, 그날의 나는 뻣뻣한 장작 마냥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그 소년에게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두 사람이 들어 왔을 때 나는 그만 온 집안사람들이 깜짝 놀라도록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와 소년은 사이좋게 손을 마주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는 일종에 운명적인 선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모습은 나에게 있어서 앞으로 있을 그녀와 나 사이에 일어날 불행한 결말을 예감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껏 다정하게 보이는 그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사랑스럽게 어울리기에 나는 그만 질투에 눈이 멀고 말았던 것이다.
아! 나라는 놈은 이다지도 천박하고도 바보 같은 놈이었단 말인가!

“당장에 우리 집에 데리고 갔으면…”
“안 돼! 찰리는 물건이 아니야!”

소년의 말을 가로막는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높은 톤이었다. 게다가, 그 음성에는 단호함과. 몰론 나만이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노의 감정이 묻어나 있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소년은 주눅이 든 모양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완고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곧 순순히 ‘알았다’라는 표시로 손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서는 그때만큼 그녀가 위대해 보였던 기억이 없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나만의 일방적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 그런 추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굳건히 눈물을 참아내고는 그 자리에 버티어 섰다.

“우리 결혼식 놀이할래?”
“뭐? …할 수 없군. 하지만, 신부님이 없잖아?”

이러한 갑작스러운 그녀의 제안에 소년은 처음에는 무척이나 놀랐지만, 곧 처음과도 마찬가지로 순순히 그녀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는 기대에 가득 차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소년이 바랐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네가 하면 되잖아.”
“뭐라고? 말도 안 돼! 그러면 신랑은 누가 하냐?”

소년은 어이없다는 듯 한 얼굴이었다. 그 속에는 한편으로 실망의 빛이 섞여 있었다.

“찰리가 할 거야.”

그 순간, 나는 뭐라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말도 안 돼! 이런 늙어빠진…”
“전혀 그렇지 않아! 찰리는 그렇게 늙지 않았어! 그렇지? 찰리?”

오! 이렇게 감동적일 때가 내게 또 있을까?

“아가씨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응하고말고요.”

나는 즐거운 마음에 생각도 없이 그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소년은 무척이나 화가 난 듯 했다.

“에잇!”

홧김에 내지른 소년의 발길질은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던 내 정강이에 꽂혔다.

“으악!”

갑작스러운 공격에 나는 그만 죽는소리를 내며 꼴사납게도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한심스럽게도 나는 기절했었던 것 같다.
다만, 지금도 잊지 않고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처럼 쓰러진 내 옆에 앉아서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무엇이 그렇게도 슬펐던 걸까? 어떤 것이 그녀를 울게 만들었던 걸까? 친구였던 소년과의 싸움 때문이었을까?
설마, 이 못난 나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내게는 너무도 과분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는 눈물 자국을 깨끗이 지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그녀가 내게로 그 조그마한 손을 내밀었다.
미련하고도 둔하기만 한 이 죄스러운 큰 몸뚱이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그녀는 무척이나 애를 썼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스스로 일어나 그녀의 가냘픈 손을 꼭 쥐어 주고 싶었다. 아울러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고 있는 눈물 자국마저도 말끔히 지워주고 싶었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럴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느려터진 나보다는 그녀가 나에게 먼저 위로의 말을 꺼냈던 것이다.
그 날 밤, 나는 내 자신의 무력함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수치심을 느꼈다. 그녀를 위해서 아무런 일도, 그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저주스러웠다.
나는 그 시절만큼 내 존재가 가치 없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러한 회의로 인해 그 날 밤 이후로 몇 번이나 나는 목숨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매번 생명의 끝을 보기도 전에 그녀의 슬퍼할 얼굴과 웃는 얼굴이 교차하는 바람에 번번이 실패만 할뿐이었다.

내 죽음으로 인해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다는 생각을 하니 도저히 목숨을 끊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분명 내가 죽는다면, 그녀는 무척이나 슬퍼 할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도 인정이 많은 아이니 분명 상처도 크고 깊게 받을 것이다.

그리고,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 역시도 그녀의 아름다운 웃음을 뒤로 한 채 세상을 등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가능하다면 영원이라는 하락되지 않는 시간을 그녀의 행복한 웃음을 띤 얼굴을 보면서 살아가고 싶었다.

나의 이러한 어리석은 바람은 곧 사라질 것이었다. 앞서서 말했지만, 성장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시간은 무척이나 길게 느껴지지만, 나에게는 한 순간인간처럼.
새로운 남자 친구가 온 것은 그녀가 이제 막 사춘기를 넘어 섰을 때쯤에서였다.

그는 어느 처녀라도 한 번 본 것만으로 혼을 빼앗길 정도로 수려한 얼굴을 한 미남이었다. 게다가 건성으로 보더라도 떡벌어진 어깨가 무척이나 강인하게 보이는, 정말이지 남자답게 생긴 남자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 초라하기만 한 내 모습이 너무도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녀의 손이 내 손목을 붙잡고 말았다. 마치, ‘제발, 여기 있어 줘.’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기에 나는 그 자리를 전혀 뜰 수가 없었다.

“이쪽이 바로 찰리야.”
“흠. 말했던 그대로군.”

그녀의 소개에 나는 단순히 머리를 조금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전에 만났던 소년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번에도 상대편인 남자에게 질투를 느꼈었지만, 한편으로는 내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한없이 열등감을 느끼기에 그러했던 것이다.

이런 나와 반대로 그는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그녀를 감싸는 듯 한 따뜻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태도는 오히려 나의 무력함과 못남을 더욱 더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나의 이런 초라한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어떻게 비추었을지… 나는 온갖 상념에 빠져 제대로 그녀의 얼굴을 처다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었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은 문 밖으로 나간 직후였다. 아마도 그녀는 나의 이러한 속 좁음과 비겁함에 무척이나 실망했으리라 생각된다.

문밖에서 들려온 그녀와 남자 친구의 웃음소리가 무겁게 내 마음속으로 가라 앉아갔다. 그리고는 그 무거운 덩어리는 이내 곧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 댔다.
그것은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지금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그런 감정… 그 날 하루 동안 나는 난생 처음 겪어본 고통으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내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어두워진지 오래였다. 어느 사이엔가 내 무릎에는 그녀가 앉아 있었다. 무척이나 피곤했던지 그녀는 다리를 쭉 편 채로 몸을 약간 뒤틀고 있었다.

그리고는 허전한 두 손을 놀리려 하지 않을 듯이 나의 목을 살며시 붙잡았다.
규칙적이면서도 길고 긴 간격을 둔 그녀의 숨소리가 나의 귀를 살며시 간지르는 가운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내는 그 피곤에 지친 숨소리가 그 날 하루 동안 내 가슴속에 단단한 돌들처럼 굳어져 있던 응어리들을 단숨에 풀어 주자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피곤에 지친 그녀가 혹시 라도 깰 것이 두려워 나는 조용히 숨을 죽여 가며, 행여 라도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라도 떨어질까 조심하며 울었다. 그리고, 눈물이 그쳤을 때에는 가만히 그녀의 평안이 깃들인 얼굴을 바라만 볼뿐이었다.

때때로 몸을 뒤척이면서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했다. 그리고는 나른하면서도 긴 간격을 둔 그 숨소리처럼 느린 어조로 우물거리듯이 누군가를 찾았다.
나는 그 이름이 바로 오늘 왔었던 그녀의 남자 친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 느꼈었던 것 같은 아픔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고나 할까?
나는 그녀의 행복으로 빛나는 얼굴을 보았을 때 이미 이런 일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그런 얼굴은 나에게까지도 자신의 감정을 전이시켜주고 마는 것이었다.
나는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내가 느꼈었던 비통함이나 불행은 모두 그녀를 위해 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 대신 내가 가슴 아프기에 그녀는 이렇게도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나는 행복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언제까지나 그녀가 그 행복한 미소를 잃지 않기를 신에게 기도 드렸다.

“그녀에게서 그 사랑스러운 미소를 제발 앗아가는 것만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저에게 그녀의 몫만큼의… 아니 그 이상의 불행을 저에게 내려 주십시오. 제발…”

하지만, 나의 기도는 공허한 외침으로 밖에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나에 대한 신의 대답은 한 달여 후에 나타났다. 그 날 그녀는 그 남자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 날은 비가 무척이나 쏟아지던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떻게 그 날을 잊을 수 있을까? 그녀의 얼굴에 가득 담긴 말 못할 슬픔과 고통들.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겪어야만 했던, 마찬가지로 느꼈던 슬픔과 고통을 몰고 온 그 불행한 일들을.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는 그만 자지러질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어찌나 놀랐던지 입으로는 차마 소리조차도 지르지 못한 채 몸 역시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마치 지옥에서 이제 막 올라온 마녀와도 같이 매우 끔찍한 모습이었다. 몹시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은 절망에 빠진 그녀를 무참하게 짓누르듯이 바닥을 향해서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듯 한 그것을 미끄럼틀을 타듯이 작은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 정말이지 그날의 그녀는 그토록 참혹할 정도로 비참한 모습이었다.
한 순간의 번개 빛이 등 뒤에서 섬광을 드리웠을 때 그녀는 쓰러질 듯이 집안으로 걸어 들어 왔다.
집까지 오는 동안에 이 세상의 비를 전부 혼자 맞은 듯이 그녀는 온 몸이 젖은 채였다. 물에 젖어 달라붙은 칼라 깃이 그녀의 가냘픈 흰 목을 세차게 할퀴어 뻘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이렇듯 비참한 지경에 놓인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아! 불쌍한 아가씨…”

라는 넋두리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 나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슬픔과 고통에 겨워하는 그 모습에 너무도 놀라고 가슴이 아팠던 나는 무력하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

간신히 몸을 추스르는가 싶더니 이내 힘이 빠진 것처럼 그녀는 거의 쓰러지다 시피 나에게로 안겼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몸을 내 몸으로써 지탱해 줄 수밖에 없었다.
섣부르게 그녀를 위로해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니, 나는 오히려 그녀의 슬픔을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심하게 무너진 그녀의 마음의 틈을 이용하려는 추악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섣부르게 그녀를 위로해 주고자 할 수 없었다. 내 귓가에 들려오는 그녀의 슬프지만 분연히 참아 내려고 애쓰는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으면서도.
그 가녀린 어깨가 심함 고통을 호소하듯이 들썩거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어떠한 것도 그녀를 위해서 해 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나는 두려워했었던 것 같다. 내 욕망을 못 이겨 그녀에게 더욱 더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줄까봐. 그리고, 그로 인해 나에게서 등을 돌릴지도 모르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나는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날 내렸던 비는 다음 날이 될 때까지도 전혀 그 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와 나는 그렇게 서로 안긴 채로 아침을 맞이했다.
어느 사이엔가 그녀는 울음을 멈추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의 부족한 기억 속에 그때에 관해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가 울음을 멈추었다는 그 사실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곧 울음과 함께 들썩이던 어깨도 안정을 되찾은 듯이 잠잠해 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은 것처럼 비는 여전히 세차게 창문을 두드려 대고 있었다.

나는 살며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조금 떨고 있었다. 한 순간, 나는 그녀가 내 손길을 싫어해서 그러한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나의 어리석은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어떠한 사고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단지, 나에게 안긴 채 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슬픈 감정은 여전히 몸 안을 돌면서 그녀를 열에 들뜬 어린아이처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마음만은 절실하게 외치고 싶었다.

“아가씨! 제발…”

하지만, 그 마음속의 외침조차도 제대로 할 말을 맺지 못한 채 나는 그녀의 머리에 내 머리를 포갠 채 그 날 밤을 보냈었다.
그날 있었던 일. 당시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지만, 그녀가 그토록 가슴 아파하던 그날의 일의 전말을 나는 아주 먼 훗날에야 겨우 알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또 다른 남자가 그녀의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그와 그녀가 진정으로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으로서 그녀와 나의 이별이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책임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적어도 그런 그라면 그녀가 힘들어 할 때 곁에서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식은 소박하지만, 수많은 축복들이 이 행복한 신혼부부들에게로 쏟아지는 가운데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도 두 사림의, 특이나 그녀의 행복을 마음속으로나마 빌어 주었다. 사실, 나는 피로연 준비에 동참하느라 그녀를 미처 만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그날의 나에게 있어서는 그녀의 하얀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그녀의 옆에 서 있는 것이 어린 시절 그녀와 함께 했었을 때처럼 나였으면 하는 어리석은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 그녀를 가장 밝게 웃을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닌 바로 그녀의 남편이었다.
물론 내가 그녀의 모습을 그 이후로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식구들과 함께 나는 그녀의 신혼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마도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봉사하라는 그녀 부모들의 의견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들의 이러한 의견은 나에게 있어서 한편으로는 기쁜 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은 서글픈 결정이었다.

그 날 이후로 그녀는 결코 내 무릎 위에 앉는 일이 없었다. 알고 있다. 언제까지나 함께할 것 같던 나의 그 작고 귀여운 아가씨는 이제 없다는 것을.
그로부터 시간은 지루하리 만치 느리게 흘러갔다. 매일의 일상은 언제나 똑같아서 어제와 오늘이 전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그 때문에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예측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어제가 전혀 구분이 가지 않는 그런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이 지루하리 만치 느리고 반복적인 일상이 무척이나 즐거운 듯 했다. 그것은 그녀의 과거 어린 시절의 모습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조금은 의외 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의구심보다는 그녀가 짓는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보는 기쁨이 내게는 더욱 더 컸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기쁜 일이 일어났다.

“오, 내 딸!”

조금은 지친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러나 이 세상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을 가득 담고 있는 듯 생기가 넘쳐흘렀다.

“당신, 수고했어.”

남편이 건네는 격려의 말도 그녀 자신이 내뱉은 감탄사만큼 그녀에게 힘을 주지는 못하는 듯 했다. 그녀는 자신과 남편이 낳은 결실을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첫 번째 아기는 그녀를 닮아 예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여자 아이였다. 아이는 소녀 시절을 자신의 엄마가 그랬었던 것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함께 보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만큼 내게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이에게 있어서 나는 단지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대상에만 불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아이는 그저 그녀가 낳은 딸 정도로 비쳐질 뿐이었다.
그녀는 신에게서 이 세상의 행복을 모두 받은 것처럼 항상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집안은 온통 그녀를 닮은 아이들로 밝게 빛나 보였다. 누구도 그 빛이 영원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 날이 오기 전 까지는.

“미안해… 당신 괜찮겠어?”
“염려 마세요… 꼭 살아 돌아오셔야 해요.”

그녀는 목이 메이는지 마지막까지 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불현 듯 이 집안에 불행의 징조가 끼어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집에 온 이후로 두 부부의 표정이 그토록 어두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 날은 웬일인지 두 사람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 제발 내가 돌아 올 때까지만 고생해 줘.”

남편의 비장감 넘치는 얼굴을 보자 그녀는 뭐라 할 말을 잃은 것처럼 그 이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남편이 문밖을 나섰을 때까지도 그녀는 내 옆에 앉은 채 그저 망연자실한 눈으로 그를 바라 볼뿐이었다.

“여보. 다녀올게.”

힘들지만 애써 그것을 지우기 위해 멋쩍게 웃어 보인 남편은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흐흐흑!”

어느 날엔가 검은 옷을 잘 차려 입은 사람이 왔던 날, 그녀는 그 날 하루 종일 울기만 했다. 검은 옷의 남자는 몇 마디 말만 전하고는 그녀에게 하얀 종이봉투를 건네주었다.
사실, 그녀는 검은 옷의 남자가 말을 건 냈을 때부터 이미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평소처럼 현관문을 열고 손님을 맞은 그녀는 그날 평소와는 달리 심한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터질 듯했지만, 억지로 억눌러졌던 그녀의 슬픔을 한 번에 터트린 것은 검은 옷의 남자가 건네 중 바로 그 하얀 색의 종이 봉투였다.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는 듯 그녀는 연신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진실은 냉혹하게도 그녀의 가슴을 거칠게 난도질해 대고 말았다.
처음에는 작은 울음소리처럼 시작되었던 그녀의 슬픔은 곧 절규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당장에 라도 찢어 낼 것처럼 거칠게 흔들어 댔다. 그녀의 슬픔을 함께 느낀 것인지 세 아이들도 모두 울어대기 시작했다. 아직 갓난아이인 막내를 제외하고 두 아이는 모두 엄마인 그녀에게로 안겼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아이들을 안을 여력마저도 없었다.

그때 그녀에게 남아 있던 힘은 모두 눈물에 씻겨 내려간 듯 그녀는 그렇게 그 날 하루 동안 울기만 했다.
나 역시 그녀를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내 어쭙잖은 위로의 말 따위는 이제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아니었다. 그녀의 슬픈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의 남편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다시는 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러한 사실들이 너무도 슬퍼 그녀와 마찬가지로 울고 말았다.

그 날 밤은 온 집안이 날이 새도록 서로가 흘린 눈물 속에 잠겨 있었다. 내 가슴에 조금 흉한 상처가 생긴 건 그 날 이후였다.
마음의 상처는 쉽게 치료 할 수 없다고들 한다. 그래서일까? 내 이 상처는 내가 죽을 때까지도 흉터를 남기고 있다. 그건 아마도 그녀 역시도 마찬가지 였으리라.
하지만, 인간은 언제까지나 하나의 감정에만 머무를 수는 없는 모양이다. 언제까지나 계속 흘릴 것만 같던 눈물을 닦고, 그녀는 곧 모든 슬픔을 떨치고 일어났다. 그러나, 가끔씩… 아주 드물지만, 가끔씩은 그녀도 역시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인해 처음의 그 날처럼 밤새 흐느껴 우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녀를 위로하곤 했다. 그녀에게는 내가 하는 그 어떠한 말보다도 그저 조용히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어주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어린 시절 순수했던 소녀로서 그녀는 나에게 안겨 울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제 강해져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남아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시간은 이제 그녀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을 듯 한 먼 곳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할머니!”
“오, 그래, 그래. 내 귀여운 손주들.”

내 무릎에 앉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은 이제 그녀가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깊게 파여 있었다. 그녀와 내가 함께 했었던 시간과 공간이 이제는 더 이상 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갔다는 증거를 그녀는 그 손길로서 이렇게 느끼곤 하는 것이다.

“어머니. 이제 이 낡은 집에서 나오셔서 저희랑…”
“아니, 아직은 너희들에게 얹혀 살만큼 힘들지는 않단다.”
“어머니도 참… 얹혀살다니요.”

이번에는 막내아들이 온 모양이었다. 어제는 그녀의 첫째 딸이 다녀갔었다. 그녀 역시도 막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늙은 어머니가 혼자 사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웠던 듯 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선…”
“그래. 그 사람 전쟁터에 나가 죽었다는 소식 듣고는 정말 슬펐었지. 그때는 그 사실이 정말 견디기 힘들었었어.”
“예.”

아들은 조용히 어머니의 말에 동조했다. 그로서는 그 당시의 일을 전혀 기억 할 수 없으리라. 그 일이 있었을 때 그는 고작해야 백일도 채 안된 갓난아기에 지나지 않아 내 무릎에 앉아 있었으니, 당시에 그녀가 겪었던 슬픔을 알 리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엊그제 같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한 편으로는 이미 30여년이 지났음을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 집도 이제 많이 낡았네요.”
“그래. 네 아버지가 나와 결혼하기 전에 손수 만든 집이었지. 그때는 이렇게 나 혼자 오래 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어머니…”
“그래서, 이 집을 떠날 수 없는 거란다. 네 아버지와의 추억이 짧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니.”
“그렇군요.”

아들은 체념한 듯 고개를 떨 굴 뿐 이후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웃고 떠드는 자신의 아이들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찰리도 나만큼 오래 살았지. 아니, 내가 갓난아기 때부터 전에 살던 부모님 집에 있었으니, 어쩌면 나보다도 더 오래 살았는지도 몰라. 아니, 확실히 나보다는 오래 살았을 거야.”
“네. 그렇지요, 아가씨.”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동조하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보면 어느새 감상에 젖어들어 눈을 감는 게 버릇처럼 된 걸로 보아 이제는 나도 늙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 할 수 있었다.

“이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이웃에 살던 소꿉친구가 발로 차서 생긴 거지.”

마른 나뭇가지 같은 그녀의 주름진 손가락이 내 다리 쪽을 힘들게 가리키자 아들은 눈으로 그것을 쫓았다. 나 역시도 그녀의 말에 따라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는 이렇게 금이 갔었고.”

그렇게 말하며 내 가슴을 쓰다듬어 본 그녀는 갑자기 그 날의 슬픔이 떠오르는지 손을 떨었다.

“그러니,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구나. 얘야.”
“… 예.”

아들은 조용히 물러 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이들을 불러 돌아갈 준비를 했다.

“어머니, 2층까지 혼자서 올라가실 수 있겠어요?”

마지막 미련이 남는 듯 아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의 걱정스런 마음을 안심시켜주려는 듯이 그녀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조용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는 느리지만, 아직은 힘이 남아있는 작은 걸음걸이로 2층의 자신의 방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그 생명력 넘치는 모습에 언제나 큰 감동을 받곤 한다. 오늘도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나는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말게나.

“아! 어머니!”

갑자기 어느 순간엔가 일그러진 막내아들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그녀에게 큰 불행이 닥쳐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가씨!”

그 이후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는 이미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쓰러진 내 위에는 분명 그녀가 옛날 소녀 시절 때처럼 안겨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놀란 나는 내 자신의 입장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불렀다. 이상하게도 평소와는 달리 그렇게 그녀를 부르는 것이 조금 힘이 들었다. 아들 역시 그녀를 부르며 내 쪽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그녀와 나를 바라본 아들의 입에서는 안도의 한 숨소리가 세어 나오는 것이 똑똑히 들렸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단지, 그녀와 아들이 나누는 몇 마디만.

“어머니! 정말 다행이에요! 이 의자가 어머니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아! 찰리… 마지막까지도 나를 위해서…”

jijab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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