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한 가운데에 누워서

나는 죽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대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 내가 누워있는 이곳은 예전에는 풍요로운 밀밭과 초목. 그리고,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던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세월이라는 흐름 속에 잊혀지고 바래져 버려 과거의 영화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곳이 되어 버렸다.

과거에 번영을 이루던 나의 형제들과 후손들은 이제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단지 힘겹게 부여된 생명을 연장해 가는 작은 미물들뿐 그 이상의 것들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덧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는 이미 이곳은 황폐화된 평야일 뿐이었다. 옛날의 영화는 이제 다시는 찾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무도 이곳을 다시 찾는 이가 없을 것이며 내가 이곳에 묻혔다는 것을 알 수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참으로 기나긴 시간을 보냈다. 살아생전에는 전혀 상상조차도 해보지 못했던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내가 지치지 않고 참아 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의 주어진 사명 때문이었다.

“너는 내가 믿는 유일한 심복이다.”

칸의 그 말은 그 후의 내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되어 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갈 육신을 잃은 직후였다. 그런 나의 죽어버린 육신의 손에는 칼과 거울이 들려져 있었다. 그리고 차가운 몸보다도 더 차가운 무쇠를 만든 갑주가 내 몸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칸의 명령에 따라 이 나라를 지키는 호위병이 된 것이다. 그 시간 이후부터 나는 칸의 안위는 물론 이 나라를 지키는 일을 맡게 되었다. 칸은 그렇게나 나를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칸과 나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처럼 지낸 사이였다.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라도 나는 그를 따라 함께 했다. 그곳이 지옥 같은 전쟁터이든 영광의 개선문 같은 곳이든 나는 그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아무런 불평 없이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랐었다.

나에게 이러한 중책을 준 것도 어쩌면 그런 나에 대한 칸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칸은 너그럽고 마음이 인자한 훌륭한 사람이니. 하지만, 그런 중책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바람을 헛되게 하고 말았다. 모든 것은 나의 무지와 무능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동쪽에서 침략자들이 쳐들어 왔을 때, 나는 칸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나는 용감히 적들을 맞아 싸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름답던 궁전은 괴물과도 같은 커다란 불길에 휩싸여 버렸고, 백성들은 크나 큰 비명 소리를 지르며 침략자들의 칼날아래 쓰러져 갔다.

그런 형제들의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어떠한 화살도 뚫지 못할 정도로 단단한 갑주가 있었고, 이 세상의 모든 방패도 꿰뚫어 버릴 수 있는 칼과 어디든지 비출 수 있는 거울이 있었건만 나는 적들을 물리 칠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내 죄스럽고 무거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불타 버린 고향을 뒤로 하며 내 앞에 섰던 그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할 정도로 기억된다.

“뭐가 외적을 막아주는 수호신이야!”
“이런 건 없애버려야 해!”

그들은 저마다 땅에 침을 뱉으며 나에게로 돌을 날렸다. 그들의 말대로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무능력자였다. 그러기에 나는 그들이 던진 돌이며 야유를 그 자리에서 그대로 감수해 내야만 했다.
형제들이 그렇게 떠난 곳은 곧바로 침략한 이민족들의 도시가 되어 버렸다. 나라의 중심에 자리 잡았던 궁전은 이미 전투 때 불타 없어졌었다. 그리고, 대신에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이민족들의 교만한 품성을 그대로 살린 그네들의 성이었다.

백성들이 살아생전에 일구었던 밀밭은 그대로 불에 타 재가 되어버렸고, 그 위에 그네들이 자랑하는 투박한 대장간들이 들어섰다. 사람들이 살던 집은 시끄러운 공동의 장소가 되어 그들이 물건들을 교환하는 여러 장소들로 변해 버렸다.

선조 대에서부터 이루어온 우리의 모든 것들이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후로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야만적인 침략자들이 유일하게 없애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지금 누워 있는 이곳이었다. 처음에는 그들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나의 장소를 파괴하려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 역시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제 과거의 우리의 것이 남아있는 곳이라고는 내가 살고 있는 이곳 한 곳뿐이었으니 어떻게든지 지켜내야만 했던 것이다. 칼을 뽑아 들고 놈들을 맞이했다. 이미 몇 놈인가 안으로 들어 온 뒤였다.

“이놈들!”

우레와 같은 내 목소리에 놈들은 움찔한 모양이었다. 그대로 이곳을 부수려던 연장들을 놓고는 곧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가 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이 작은 승리에 만족했지만, 곧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살 곳은 이렇게도 결사적으로 지킬 용기가 있었으면서도 정작 나라를 위해서는 꽁무니만 뺀 비겁한 겁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뿐만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 후로 더 이상 아무도 이곳을 해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마음속에는 과거에 행했던 부끄러운 마음이 남아있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침략자들은 이제 완전히 정착되어갔다. 그들은 더 이상 침략민족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들이 이곳의 정착민이었다. 나 역시도 나의 조상들이 이루어 놓았던 행적들이 이제는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해 질정도로 멀게만 느껴질 뿐 실감은 나지 않았다.

새로운 정착민들은 많은 것들을 이룩해 갔다. 과거에 정착민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번영을 이루어 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든 이 도시는 이제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더 크게 발전해 갔다. 사람들의 수는 상상을 불허 할 만큼 그 규모를 불리어 갔고, 도시의 크기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들에게 절대적인 불가능이라는 것은 없어보였다. 언제까지나 영원히 그들의 세상이 이곳에서 계속 되어 질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들도 역시 인간이었다. 하늘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엄청난 소리가 천지를 울리는 가운데에 그 외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를 쓰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 해보이듯이 신음소리를 냈지만, 어느 것 하나 그 엄청난 소리를 넘어서는 것은 없었다.

그 소리가 그쳤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도 그들이 지은 건물도 그 어느 것 하나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도시는 완전히 죽어 버린 것이다. 밤이 되면 흉흉한 동물인 늑대와 여우가 죽은 시체를 찾아 해매는 소리만이 들릴 뿐 그 어떤 것도 살아 있는 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또 다시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늑대도 여우도 있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도 이제는 세상에서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만 것이다. 하늘은 이제 더 이상 그 빛을 지상에 뿌리지 않았다. 밤이 되어도 달은 나오지 않는다. 세상은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내가 처한 상황을 깨닫기까지는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에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하늘에서부터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들이 나의 마음을 더욱 더 두렵게 만들기만 하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엔가 나는 밝게 쏟아지는 빛을 보았다. 그것은 한 줄기의 가느다란 실오라기와도 같이 미약한 것이었지만, 거기에는 분명 강렬한 태양의 냄새가 묻어나 있었다.
처음에는 하늘이 다시 그 빛을 열은 것만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어렴풋하게나마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늘은 처음부터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무거운 하늘의 공기가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래들이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거대한 양의 모래들. 그것들이 내 위를 덮어 저 하늘의 빛을 막아 버린 것이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안심 할 수 있었다. 하늘은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곧 다시 그 밝은 빛을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또 다시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볼 수 가 없었다. 언젠가부터 모래틈 사이로 내려오던 가느다란 빛마저도 이제는 볼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나는 슬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두려웠었고, 더 이상 희망이 없음에 절망하며 울부짖었다. 칸을 원망했던 적도 있었다. 애시당초 나에게 버거운 이 일을 맡긴 것에 대한 원망을 하며 짧지 않은 시간들을 보낸 적도 있었다.
내가 가장 절실하면서도 힘겹게 느낀 것은 외로움이었다. 그 어떤 것도 모든 것이 죽어 있는 이 지하에서는 나와 교감을 나눠 줄만 한 것들이 없었다. 이곳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홀로 무너져 내린 문명들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쌓아 올린 이들에 관한 추억만을 회상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더욱이 내가 죽었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마저도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죽었지만, 이곳에 남아 하늘의 부름을 받지 못한 채 있는 것이었다. 나 혼자만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억울하게만 느껴졌다.

매일 밤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향해서 기도를 올렸다. 이 저주받을 모래들을 다 걷어 달라고. 그래서, 죽어있는 내 영혼을 발견해 그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빌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 상태에서는 어느 곳이 되던지 상관없었다. 다만, 이 견딜 수 없는 고독을 씻을 수만 있다면 어떠한 대가도 치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어리석은 기도에 대한 답은 또 다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이루어 질 수 있었다. 그 날은 과거에 이곳이 세상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소리가 주위를 긴장케 만든 때였다.

“오! 빛이… 저렇게나 많이!”

나는 갑작스럽게 내리쬔 한 다발의 빛무리들을 보자 너무도 감격해서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빛이었다. 그것을 보자 내 마음 속에서는 알 수 없는 설래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나의 바램을 들러주려는 듯이 요란한 소리가 온 지하를 울려대기 시작했다. 간간히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조금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것들은 분명 과거에 내가 알고 있는 그 소리들이었다. 나는 너무도 기뻐서 뛸 듯이 소리쳤다. 그리고, 어서 이곳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게 나를 데려가 달라고 그들에게 소리쳤다.

분명 나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들렸을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에 들어왔던 빛의 다발은 점점 그 크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한 무더기의 모래가 무너져 내리자 강렬한 태양빛이 나의 눈 속으로 빨려들 듯이 들어왔다.

“우와!”
“여기요! 여기!”

빛과 함께 사람들이 떠드는 듯 한 요란한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오랜만에 본 태양빛 때문에 그들의 얼굴을 확인 할 수는 없었지만, 쓰는 말씨를 봐서는 과거에 이곳에 살았던 이들의 후손이라고 판단했다.

“흠…”

나에게 쏟아지는 빛을 가로막고 선 자의 얼굴을 보자 나는 그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마도 내가 아직까지 살아있었다면 미친 듯이 소리라도 질렀을 것이다. 그의 얼굴은 이제껏 보지 못할 정도로 새하얀 색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가 나와 마찬가지로 죽은 송장인줄로만 알았다.

그는 이곳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인 듯싶었다. 다들 그를 두고 교수님이라고 부르며 굽실거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칸에게도 이런 정도의 권력은 없었다. 그가 아마도 이곳의 새로운 지도자라고 생각됐다. 그리고, 그의 명령에 의해 나를 저 밝은 태양이 있는 곳으로 끄집어냈다고 추측해 보았다.

밤이 되자 그 동안 그토록 그리워했던 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참으로 얼마 만에 보는 하늘의 빛인가 하는 생각에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이미 메마른 사막과도 같은 내 눈에서 눈물은 흘러내릴 수 없었지만, 나의 영혼을 담고 있는 가슴속에서는 비 오듯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동안 느껴왔던 고독이 씻은 듯이 사라져 가는 느낌이었다.

모래들이 걷힌 뒤에 보인 모든 것들은 이전에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형태가 온전한 것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은 분명 과거에 내가 보아오던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보자 이제는 시간의 저편으로 흘러가 버린 옛 모습들이 어렴풋하게 마나 나의 어지러운 기억들 속에서 새롭게 솟아나고 있었다.

“이것이 왕의 미라인가요?”

교수를 비롯한 일단의 무리들이 나를 둘러싸며 저마다 한 마디들을 했다. 천막 안으로 내 몸을 옮기자마자, 나를 둘러싸며 경탄을 금치 못하던 그들은 나를 구경꺼리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두운 모래 밑에서 꺼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이런 식의 모욕은 정말로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것 같군. 이 칼과 거울과 갑옷은 당시의 권력자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들이니. 능의 크기를 봐서 지도자급정도 되는데…”

그들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나를 칸과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의 이 잘못된 추측에 대해서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몸이었다.
칸과 같은 호칭이나 대우를 받는 것은 금기였다. 칸은 이 세상에 하나뿐인 신과도 같은 사람이니 감히 나 같은 자가 이런 착각의 대상이 되는 것조차도 죄가 되는 일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들의 잘못된 판단을 이야기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나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말을 산 사람이 알아들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들에 의해서 죽은 칸이 되어 버렸다. 과거에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한 채 불쌍하게도 그들은 나를 칸으로 믿고 자신들이 만든 기록지에 열심히 기록해 나갔다. 나로서는 웃음이 터져 나오리만치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죽은 칸을 대신하는 것도 그리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 이제 칸도 죽고 없는 세상이었다. 이제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제 이 땅의 새로운 지배자는 저 얼굴 하얀 교수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칸은 이 곳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다. 그것도 이제는 영혼이 빠져나간 빈 껍질뿐이겠지만. 이제는 내가 칸인 것이다. 오래된 과거의 이 땅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세상을 살아온 신에 버금가는 인물인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교만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분수를 잊은 교만한 자의 버릇없는 행동일는지 모른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것에 대한 하늘이 내린 벌이었을까?

“교수님! 새로운 미라가…”

헐레벌떡 달려온 신하에 의해 교수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반나절이 지나서 천막 안으로 들어 온 것은 나도 전부터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칸!”

놀란 나의 눈은 이제는 움직이지 않았을 법 한데도 크게 떠진 것만 같았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 칸이었다. 이제는 그 위대한 영혼이 빠져나간 빈껍데기에 불과했지만, 그 모습은 살아생전에 내 기억 속에 남아있던 칸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된 걸까요?”
“글쎄… 처음 발굴한 시신이 왕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건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군.”

칸을 둘러싼 그들은 저마다 감탄해 마지않는 소리를 연거푸 해댔다. 그때까지 내게 쏟아졌던 그들의 관심과 찬사가 모두 다시 칸에게로 돌아 간 것이다.
서운한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죽은 칸에게서 빌려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나는 운 좋게 칸보다 먼저 발견되어 그들의 착각에 의해 칸의 영광을 훔친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학회에는 먼저 발굴한 미라를 지도자로 보고했지 않습니까?”
“그래. 이거 정말 낭패군.”

칸을 둘러싼 그들은 내용을 알 수 없는 말들을 서로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중대한 문제에 빠진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에 나는 슬그머니 칸에 대한 질투와 미움이 싹트기 시작했다. 처음 발견된 것은 나였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칸이라고 불렀다. 비록 그것이 진짜 칸에게서 비겁하게 훔친 지위이기는 하지만, 칸이 발견만 되지 않았더라도 지금의 나는 칸으로서 이 세상에 남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칸이 못 견디게 미워졌다. 차라리, 칸이 저 어두운 밑바닥에서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었으면 하는 헛된 망상도 해 보았다.

“우리이외에는 아무도 이 사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겠지?”
“예. 설마…”
“그래.”

악당들이 모의가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칸의 신분을 묻어버리기로 한 것 같았다. 시신에 대한 크나 큰 모욕으로서 훼손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바라보기만 할뿐 어떠한 말이나 행동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움직이지 못하는 몸과 들리지도 않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것마저도 행하지 않았다.
칸이 되겠다는 욕심에 나는 모든 것을 묵인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윽고,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거기에 칸은 없었다. 다만 여기 저기 훼손된 하나의 시신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칸이 되었고, 칸은 이름 없는 사체가 되었다.

“하지만, 왜 시체가 두 개나 있었을까요?”
“순장이겠지. 왕이 죽으면 그와 함께 부렸던 사람들도 같이 뭍던 풍습이 있었으니. 그 당시에는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하나의 일이었어. 아마 더 파 내려가면 다른 시신들도 많이 있을 거야. 처음에 발굴한 건 갑주를 입은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죽은 사람의 측근 호위무사정도는 되었나보지. 칼과 거울은 그래서 들고 있었던 거고. 덕분에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질러서…”

무슨 말일까? 그럼, 나는 칸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란 말인가? 갑자기 머릿속이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칸을 배신했다는 죄악감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독약을 먹이거나 수면제를 먹여서 일단 의식불명 상태를 만들고는 흉기로 마무리를 지었겠지. 생각해보면 굉장히 잔인한 풍습이야. 저 세상에까지 가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자랑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들이었다. 인자한 칸이 자신의 무덤을 과시하기 위해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많은 세월이 흐르도록 승천하지 못한 채 이곳에 남아 이 땅을 지키고자 했던 나의 바람은 어떻게 된 것인가? 나는 무엇을 근거로 칸을 믿고 과거에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단 말인가? 그리고, 그러한 칸의 지위를 강탈하면서까지 갈등했던 마음은 또한 무엇 이었단 말인가?

누구도 대답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교수도, 썩어빠진 시체로 전락한 칸도. 그 누구도 나에게 그것에 대한 해명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어리석음을 탓한들 이제는 너무도 늦어버린 시간들이었다.
과거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이제 칸일 따름이다.

jijabella

About 이 광희

이 블로그의 운영자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You may use these HTML tags and attributes: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 <strike> <strong>